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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슈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등록일 2021-11-23 글쓴이 관리자 조회 15


 

 

노태우 대통령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전두환 대통령의 별세 소식이 속보로 전해졌다.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해에 사망했는데 그 소식이 연상된다.

최근까지 민주화운동에 대한 문제로 시끄러웠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다. 암이 있었다고 하는데 항암제를 투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향년 90세... 이순자 여사가 임종을 지켜봤다고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전두환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 이제 국가장 문제가 시끄러워질 듯하다. 전 대통령이 역사적 과오에 대해 국민적 화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점은 전두환의 오점으로 남을 듯싶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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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역사에 대한 사죄 없이 23일 숨졌다. 향년 90세.

현대사 가장 어두웠던 시기, 불완전하게 매듭지다

지병을 앓아오던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내에서 쓰러졌고, 오전 8시 55분쯤 경찰과 소방에 신고됐다.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시신은 곧 연대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다.

지난달 26일 12·12 군사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되지 않아 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하는 작전을 진두지휘했다는 책임을 받았다.

그는 또 1979년 12·12 군부 쿠테타를 주도하면서 한국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역사적 책임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숨지면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웠던 한 시기가 불완전하게 매듭지게 됐다.

가난했던 농부의 아들, 육사에 진학하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 경남 합천 율곡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남매 중 넷째 아들이었다. 형 둘이 어려서 숨졌고 셋째형 기환씨, 동생 경환씨와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5세 때 집이 대구로 이사해, 대구공업중학교와 대구공고를 다녔다. 집안이 어려워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대신 국비로 다닐 수 있는 육사에 1951년 입학했다. 육사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 정호용 전 육군참모총장 등과 우정이 두터웠다.

전 전 대통령은 체력이 좋았고, 또 운동광이었다. 특히 축구를 잘했고, 생도 시절에는 육사 대표팀 골키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가 대통령 시절 박종환 당시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을 불러 전술을 직접 지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한 직후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 육사 참모장이던 당시 육군 대령 이규동의 관사에 들락거리다가 딸 이순자를 만났고, 몇 년 뒤 둘은 결혼했다.

정치 군인,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주도하다

육사에서 성적이 좋은 편에 속해 임관 뒤에는 미국 유학을 가기도 했다. 엘리트 코스인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육군 대위였던 그는 육사에 근무했던 장교들과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정치 군인’으로의 길을 걷겠다는 그의 속내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일개 위관급 장교에 불과했던 전 대위는 이 시위 주도를 통해 박정희 소장의 눈에 들게 됐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 비서관에 임명되는 등 고속 승진의 길을 트게 됐다.

인맥과 ‘패밀리’ 정신을 중요시 여겼던 그는 1962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하나회는 훗날 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데 핵심 기반이 됐다.

이후 그는 1963년에 당시 박정희 정권을 지탱해주는 핵심 조직이던 중앙정보부의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에는 육사 동기생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 육사 출신들의 선망의 근무처이던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 자리에 임명됐다.

전 전 대통령은 1970년에 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이듬해 귀국해서는 전공을 인정받아 제1공수특전단 단장에 임명됐다.

1974년에 역시 동기생 중 처음으로 김복동 전 5사단장 등과 함께 준장에 진급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 제1사단장 시절에는 제3땅굴을 발견한 공로를 세웠다.

국민일보 DB


광주를 피로 진압하고 대통령에 오르다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자신의 운명을 바꾸게 된 보직인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보안사령관 때 맞닥뜨린 10·26 사태부터 이듬해 8월 그 자신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단 1년만에 모든 권력이 자신으로 집중되게끔 용의주도하게 행동했고, 목숨을 걸고 12·12 쿠데타를 주도하기도 했다.

10.26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돼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계엄사 산하에 군 자체적인 수사본부를 설치해 수사를 주도한다는 아이디어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는 계획 역시 최초 기안자는 전 전 대통령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2월 12일 단 하루만에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그 주변 인물들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함으로써 최고의 실세로 등장했다.

그는 이후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거치며 권력 장악에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80년 5월 신군부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광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며 수백명의 희생자를 낳기도 했다.

민주화 시위에 시달리다 퇴임 이후 감옥에 가다

그는 1980년 8월15일에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그러고는 8월29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치러진 대선에 단독출마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돼 9월에 공식취임했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9월에 대통령 임기 7년 단임제 및 간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한 새 헌법을 만들어 공포했다. 이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에 또 당선돼 그해 3월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5공화국 정부를 출범시켰다.

10·26 사태 이후 단 17개월만에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권 기간 내내 민주화 시위에 시달렸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시위는 전 전 대통령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12·12 반란죄 등의 혐의로 감옥에 보내졌다.

역사학자들은 전 전 대통령의 어려서부터 형성된 저돌적이고,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인해 대한민국의 역사가 굴절되기에 이르렀고,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같은 비극이 빚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승욱 문동성 기자 apples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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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대통령 별세 2021-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