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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다

유미주 외 | 2022년 02월 01일

가격 8,000원 | 면수 108

슬기로운 번역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들 이야기_번역하다_창간호

  • 책소개

    슬기로운 번역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들 이야기_번역하다_창간호

     

    별별 이유로 매몰차게 등을 돌린 세상에서 아등바등 사는 번역가들의 일상과 생각과 철학을 엿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원고를 보니 번역가의 희로애락과 성찰이 잘 어우러져 한 작품나오겠다 생각했다. 번역가는 보편적인 작가가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희열과 좌절을 느낀다. 원작이라는 경계와 틀을 벗어날 수 없는 탓에 100퍼센트 창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경계는 늘 애매하고 모호하다. 이때 경계선을 조율하는 주체는 오직 번역가뿐이다. 은연중에 선을 넘는 경우도 더러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독자가 (원문을 모르는 터라) 되레 이를 반기는 기막힌 상황도 연출된다. 그러면 속으로는 조바심이 나겠지만 겉으로는 멋쩍은 미소를 날릴 것이다. 그 외의 생생한 경험담도 기대해 봄직하다.

     

  • 저자 및 옮긴이

    유미주

    요나

    이준서

    이주형

    이창훈

    연지원

    주현우

    현소연

    정보람

    이유진

    현소희

    제 니

     

  • 목차

    커버스토리

    겨울여행 유미주

     

    라이프 앤 워크Life & Work

    누가 번역을 무시하는가 연지원

    번역가의 200퍼센트 이준서

    번역하는 마음 현소연

    비영어권 번역가를 위한 글 정보람

    장애아의 부모에서 번역가로 이유진

     

    왜 작문 능력은 검증하지 않을까? 주현우

    통역대학원을 떠나 잠시 쉬어가는 길 박서영

    소설도 옮기고 요가도 합니다

    이례적인 일 현소희

    번역, 두 얼굴의 수수께끼 요나

     

    의 한 수

     

    번역논단

    모두가 번역을 포기한 말, 포렌식 이주형

    직역과 의역은 없다 유지훈

     

    번역가의 서재

    Editor’s Pick

     

  • 본문중에서

     

    겨울여행

    유미주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어딘가 기록했다. 낡은 공책이나 메모지 귀퉁이에 빼곡하게 적힌 기록엔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이유 외에도 그날 날씨라던가 기분, 해야 할 일 같은 일상이 담겨있어서 기록이라기보단 내킬 때 쓰는 일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적은 순간들을 곁에 두고 자주 보다 보면 자연스레 덧정이 붙어 좋아하는 것을 금방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어느 브랜드의 과자부터 사강이나 뒤라스 같은 작가들, 프랑스어에 이르기까지 총총히 모인 애정의 역사는 여전히 크고 작은 설렘을 유지한 채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리듬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왜인지 번역을 시작한 뒤로 좋아하는 것을 적어본 적이 없다. 타국의 언어를 옮겨내는 과정 밖의 일들에 무심하거나 방 안에 고립되고 지쳐 무언가를 좋아할 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뭐라고 할까, 여남은 것을 제쳐두고 먼저 적어내야 할 소중한 것이 남았다는 모호한 심경으로 오랫동안 공책 한구석을 비울 뿐이었다. 그러니 새로 읽거나 들은 것을 좋아하게 되어도 쉽사리 인상을 새겨두기 어려운 것은, 청산해야 할 사랑 하나가 오롯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직 기록하지 못한 것, 나는 그것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잊고 있던 상자를 우연히 열게 된 작년이었다. 예년보다 지난한 겨울을 맞아 갑작스레 여행을 떠나려 짐을 챙기는데, 겨울옷을 꺼내려 헤집은 장롱 어느 구석 익숙한 상자 하나에 손길이 멈췄다. 어렵지 않은 문서 번역을 맡았지만 일이 겹치고 작업이 더뎌 하루가 무척 길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겨우 일이 끝나 공부를 시작해도 마음이 뜨고 어지러웠다. 묘한 권태감이 문장 사이를 메우자 밀도 높은 피로가 몰려왔고 더는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시작한 여행이었다. 홀린 듯 다 제쳐두고 상자만 든 채 제천으로 떠났다. 십이월 어느 날 여전히 공책에 번역을 적지 못한 채로.

     

    소설로 인생에 복무한다던 이승우 소설가처럼, 나 역시 책상 앞에서 번역으로 인생에 복무하고 싶다는 조그만 바람을 되새기고 있다. 언제 무엇을 하든 어디서 어떤 자신으로 존재하든, 때를 잊고 자리로 돌아가 작은 나라 둘을 잇는 것으로 생이 두터워질 거라 믿는다. 일어나면 어제 먹다 남아 얼음이 다 녹은 커피를 홀짝이고 재떨이를 갈거나 세수를 하고, 샌드위치를 먹고 피곤하면 체조도 한다. 순서가 뒤바뀌어도 좋다. 어쨌거나 끝에는 오래 사용해 푹신하지 않은 방석과 칠이 벗겨진 나무 책상 앞에 앉게 되는 순리에 따르게 된다.